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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희연
기호로서의 풀, 자연과 의상(意象)의 접점을 찾아서 | 2011년 06월 09일 13시 36분

 기호로서의 풀, 자연과 의상(意象)의 접점을 찾아서

—권희연의 근작 <生 ― 낮은 곳>

 
 
미술평론가 김복영 (전 홍익대 교수⋅철학박사⋅한국조형예술학회장)
 
 
 
1
권희연의 근작들에는 이름 없는 풀들이 빼곡하게 그려져 있다. 풀들은 형해만 있고 대지의 어느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다고 하늘이나 허공으로 부상하는 건 아니다. 풀들의 생김새는 겉보기에는 풀이지만 자세히 보면 풀이 아니다. 풀같이 생긴 ‘기호’(sign)다. 기호로서의 풀이다.
기호로서의 풀은 뾰족한 끝으로부터 몸 한가운데에 이르러 곡률이 커지다가 하단에서 점차 완만해지면서 끝난다. 가느다란 필획은 오간색이나 오정색을 바탕으로, 대개는 바탕색 보다 밝거나 진한 백(白), 홍(紅), 황(黃)의 곧은 획이다. 빠르게 그은 게 눈에 띈다. 여유있고 넓은 획으로 완만하게 그은 것도 있다. 전자일 경우는 부감시에 의한 전면화(全面畵)가, 후자일 경우는 평원시와 고원시를 준용하였다. 하늘과 대지를 상하로 나눈 이분화(二分畵)나 그리드에 의한 섹션화(畵)가 특징이다. 이 외에도 우유빛과 다홍을 발염(拔染)한 작품도 있다.
이 가운데서도 전면화가 압권이다. 주로 오간색 가운데서 벽(碧), 홍(紅), 류황(駵黃), 록(綠)을 바탕색으로 백(白), 황(黃), 적(赤) 같은 오정색의 유채선을 사용한다. 풀 하나 하나는 생긴 모습이 전체적으로 유사한지만, 무리를 짓는 맵시에 따라 풀의 만곡과 벡터가 다르다. 다름에 따라서 풀들의 생김이 다양하다. 풀들의 집합은 은하의 거대 공간처럼, 풀 무리의 배후에 존재하는 광활한 태허(太虛)를 느끼게 한다. 개개의 풀들이 성단처럼 밀집해 있거나 일부를 비움으로써, 이를테면 채움과 비움의 차별적 안배를 보인다. 안배의 차별에 의해 근작들은 밀도가 성긴데서 콤팩한 데 이르는 다양성을 드러낸다. 성운(星雲)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보리밭이나 늪지의 언덕, 아니면 대지의 여기저기에 임의로 돋아난 풀밭을 상기시킨다.
이에 비해, 평원과 고원의 시선으로 그린 상하 이분화(畵)는 하늘과 땅을 별도로 구분해서 변화를 시도하는가 하면, 섹션화는 그리드에 의한 다수의 화면분활을 다루었다. 이분화는 다소 좁은 벽(碧) 하늘과 약간 넓은 흑회(黑灰)의 대지, 아니면 좀 넓은 흑회의 하늘과 다소 좁은 홍(紅)의 대지로 나뉜다. 화면은 대기의 이동에 따라 완만하거나 여유있는 필획이 무거운 대지에서 휑한 하늘로 흩날리는 자태를 여실하게 시연한다. 섹션화는 이 분위기를 연장해서 복수화하고 단일 면에다 우유빛과 다홍을 발염한 전면화는 부드러운 라운드 스펙트를 풀과 교합시켜 우아한 화면을 보여준다.
 
 
2
권희연의 근작 <生 ― 낮은 곳>에 나오는 풀들은 거의가 이름 없는 풀이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풀이다. 이름이 풀이지 풀같지 않는 풀이다. 다시 말하지만 기호로서의 풀이다. 풀을 닮은 기호를 써서 풀처럼 보이도록 한 거다.
풀은 기실 작가가 자연의 사물을 ‘의상’(意象, intentional image)을 빌려 나타내기 위한 미소(微小) 수단이자 분자적 단위로 차용되었다. 자연과 의상의 접점을 시도하기 위한 ‘대리물’(代理物, representative)로 등장시켰다. 자연에다 ‘의’(意, intention)와 ‘상’(象, image, Bild)의 집합의 논리를 대응시키기 위해서다. 풀을 그리되 풀의 상을 ‘간’(簡)과 ‘일’(逸)을 준거로 기호처럼 약호화한 게 눈에 띈다. ‘필을 간소화해서 형을 구비함으로써 자연을 이해하는’(筆簡形具而得之自然) 동아시아의 품새를 일단 상기시킨다.
권희연의 풀 그림을 볼 때, 보는 이가 중국화론가라면, 노자에서 시작하고 고개지에서 장언원에 이르는 중국화의 전통 화맥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할 것 같다. 소위 ‘회중유시’(繪中有詩)와 다르지 않다고 할지 모른다. 뿐만 아니라, 보는 이가 서양미술 이론가라면 스콜라 철학의 위대한 교부 성 토마스의 가르침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성의 올바른 규칙’(recta ordinatio rationis)으로 압축되는 토미즘(Tomism)은 그림이란 미물을 빌려 하나님의 로고스를 드러내는 데 뜻이 있다. 이 방향타가 서양미술에서 균형과 시메트리, 완전성과 명료성 같은 주지주의적 규범을 앞세워 중세미술에서부터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그 세를 견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권희연의 화의(畵意)가 동과 서의 미적 교양경험에 두고 있다는 걸 전적으로 부인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굳이 중국조(中國調)나 서양조(調)를 빌려 이해하고 싶지는 않다. 우리의 세계관인 한국조(韓國調)가 이것들에 못지않고 또 보다 적합하기 때문이다. 생각하건대, 권희연의 화의(畵意)에서 어디가 왕유 풍(風)의 ‘회중유시’란 말인가? 토미즘의 완정성이나 명료성이 그녀의 그림의 어느 구석에 도사리고 있다는 건가? 두루뭉실한 짝패들을 굳이 들이댄다면 그럴사 할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요컨대, 권희연의 <生― 낮은 곳>을 우리 식(式) 사유체계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 먼저 그녀의 화의 중에서 ‘의’(意)에 대해서 말한다. 여기서 ‘의’는 ‘상’을 전제로 한 경우 만을 다룬다. 예컨대 순수한 개념은 제외된다. 더불어 관념 산수에서처럼, 주관적인 화의 또한 제외된다. 넓게는 자연을 앞에 하고 자연과 조우하려는 의식활동 일체를 포괄한다. 자연과 화자(畵者, picturer) 간의 거리와 틈새를 허용하지 않는다.
다른 한편, 우리 식 사유전통에는 중국 선진(先秦) 시대의 최고 의계(意界)인 ‘도’(道, Tao)가 없다는 데 유의해야 한다. 조선조 중기의 퇴계학과 그 후의 성리학의 발전을 빼면 말이다. 이것들은 주자학(朱子學)의 한국판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우리 고유의 세계관이라면, 노자가 살았던 선진 시대(BC 7세기)와 평행선상의 고대세계로 소급시켜야 한다. 우리의 고대 세계관의 최고 의계는 ‘도’ 대신 ‘크고 둥글고 하나’(大圓一)라는 대의계(大意界)다. 달리 말하면 도가 아니라 ‘한님’(桓因)이다. 오늘의 우리 말로 하면 하나님이고 하느님이다. 이 말은 서양의 하나님이나 중국의 도가 아니다. ‘한’(桓)은 오늘의 한자음으로는 ‘환’이지만 옛 음으로는 ‘한’이다. ‘한’은 여러 가지 뜻이 있다. 크게 말해, ‘근접하기 어려운 홀로 존재하는 이름’(難進公圭)이다. 홀로 존재하는 이름의 핵심이 ‘공규’(公圭)다. ‘공규’의 공(公)은 사사로운 걸 떠나 있다는 걸 뜻한다. ‘규’(圭)는 ‘홀로 있고 위에 있고 둥글다’(瑞上圓)는 대원일사상을 한마디로 압축한 거다. 구체적으로는 대원일의 (方)과 양(量)을 무극(無極), 대극(對極), 태극(太極)으로 나누고 이것들을 포괄한 말이다. ‘해의 그림자를 가지고 땅을 재는 것’(測日影土)이 그 한 에다. 이게 모두 ‘대원일’과 ‘한’(桓)에 얽힌 한국식 의계의 이모저모다.
다음으로는 ‘상’(象)에 대해서 말한다. ‘의’에서와 마찬 가지로, 여기서 ‘상’은 의를 전제로 한 상을 지칭하고 의를 전제로 하지 않는 형사(形似)와는 엄격히 구별한다. 상은 한님의 ‘님’(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님’의 옛 한자 ‘인’(因)은 우리말의 존칭어 ‘님’에 해당하지만, 앞서 말한 ‘한’의 의인화(擬人化)이자 ‘원인자’(原因子)의 상을 아울러 뜻한다. 그래서 ‘인’은 하늘과 땅과 사람을 일컫는 3재(才)의 최고 최초의 원인 상(原因象)이다. 모든 상의 ‘제일 원인’(causa prima)이다. 삼라만상의 상이 여기서 유출되었다. 유출된 일체는 ‘한’의 본질인 ‘대원일’(크고⋅둥글고⋅하나인 것)의 ‘상’을 품새로 갖는다. 그래서 일체 자연의 삼재가 갖는 ‘상’은 대원일의 방과 양을 포괄한다. 아름다운 상이건 비천한 상이건 말이다.
다른 한편, ‘상’은 ‘의’로부터 떠나있지 않다는 데 다시 한번 유의해야 한다. 우리의 사유체계에서는 이 둘은 따로 있지 않다. 이게 오늘의 양자론적 세계관과도 잘 들어맞는다. 오늘의 첨단 세계관에서는 의를 가지지 않은 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의와 상은 특수상대론적이다. 상을 가지지 아니한 의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가 화론을 말할 때, 무엇 때문에 의가 없는 상을 말하고 상이 없는 의를 말하는가? 이건 중근세의 중국사상, 스콜라사상 같은 전근대식 이원론의 사유방식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우리의 사유체계는 중국화론에서처럼, ‘하나’(의)와 ‘다른 하나’(상)를 차별화한다든지, 의상(意象)과 형사(形似)의 이분법이나, 서구식 주(主)와 객(客), 관념론과 실재론 따위의 이원론적 패러다임을 용납하지 않았다. 우리식 사유에는 이분법이나 이원론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원론이 아니니 일원론은 더욱 아니다. 그러면서도 자연스럽게 자연과 만물을 이해하는 데 부족한 게 없었다. 의와 상은 생각하는 방편이지 본질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의 전래적 세계관이 오히려 오늘의 현대적 세계관과 부합한다.
권희연의 풀 그림의 의와 상을 말할 경우, 의로부터 상을 분리시켜, 이분법이나 이원론으로 읽어선 안된다. 가령, 상 이전에 존재하는 의를 찾기 위해 작가가 풀의 상을 간일(簡逸)하게 그렸다고 생각해선 안된다. 이건 중국식이거나 스콜라식에 경도된 사람들의 이해일 뿐이다.
 
<生 ― 낮은 곳>에서 볼 수 있는 식물성의 세계는 고요하고 정지되어 있으나 반복의 흐름으로 틈을 메우며 순환 사이를 그려나간다. 그것은 주어진 공간에 침묵하고 수직으로 뻗어 올라가 공간위로 부풀어 오른다(「노트」2009).
 
그녀가 풀을 다루면서 말한 이 언급은 자연을 의와 상으로 분리하기 이전의, 달리 말하면 자연과 의상, 형사와 의상 등 일체의 항들 간의 ‘접점’(接點, meeting point)을 시사한다. 더 정확히 말해 양항들 간의 수렴(收斂, convergence)의 극한을 시도한다. 그녀는 ‘구체적인 풍경이 아님에도 풍경인 것’(같은 글)의 근원을 이 접점에서 찾는다. 접점의 극한을 찾는 게 그녀의 과제다. 자세히는 ‘무엇이 반복의 흐름을 풀에다 부여하고 풀과 풀의 틈새를 만드는가?’ ‘주어진 공간을 수용하면서 수직으로 뻗어 올라가 공간을 만드는 건 무엇인가?’ 대체로 이런 의문이 그녀가 생각하는 ‘상’의 기표적 측면이지만, 그녀의 기표는 ‘의’의 기의와 즉각적인 화해를 시사한다. 이점에서 그녀의 풀 기호는 기표와 기의의 수렴점에 선다.
이를 시연하는 게 <生 ― 낮은 곳>이다. 그 핵심이랄 수 있는 게 ‘기호’(sign)이고 기호작용(semiosis)이다. 그녀에게서 기호는 자연이 생성되기 이전 또는 이후의 것이 아니라 생성과 더불어 존재하고 생성의 한 가운데서 작용한다. 전문 용어로는 ‘아나로기아’(analogia)다. 화엄철학으로는 ‘연기’(緣起, pratïtya‐samutpāda)다.
권희연에게서는 의와 상의 이분법이 허용되지 않는다. 우리의 사유체계는 자연과 의상의 만남을 인디아 식 아나로기아 보다 한층 높은 수준의 걸 요구한다. 그래서 일체가 아나로기아이고 기호의 작동(semiosis)에서 유출된 것으로 이해한다. 먼저는 의와 상이 유출되었고 이어서 자연이 유출되었다. 의상과 자연은 궁극적으로 연기(아나로기아)의 산물이다. 이러한 한, 기호작용의 산물이다. 기호작용으로서의 기호는 현대 서구의 ‘기호의 삼각형’(Semiotic Triangle)이 말하는 절대 차별화로서의 기표와 기의 같은 게 아니다.
자연스레 흐르는 풀들은 단색으로 조율되어 하나의 배경, 막, 풍경을 만든다. 구체적인 풍경이 아님에도 넓은 의미의 풍경을 만든다. 실재하는 자연의 세계에서 기호들을 차용함으로써 자연과는 독립적인 화면을 만든다. 그것이 지표의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되는 풀의 생장작용이나 생명력을 그리는 동기다. 그래서 자연의 이치와 섭리가 인간의 삶 속에서 소통되기를 기대한다(같은 글, 일부 번안⋅필자).
 
권희연의 풀은 그의 언급처럼, 자연을 직접 보여주기 보다는 공간에 자리한 매개로서 풀이다. 풀을 빌려 자연과 의상의 접점을 시도한다. 이 때문에 그녀의 풀은 풀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연과 의상의 매개요 매개로서의 기호다.
 
 
3
권희연이 <生 ― 낮은 곳>에 이르는 도정은 1990년대 후반의 연작 <生>으로 소급된다. 대체로 세번의 스텝을 밟아 오늘에 이르렀다. 처음의 것은 구두 닦는 노인, 중년의 노동자들, 일터의 아줌마 부대 같은 기층민의 애환을 다룬 탐색시절의 작품들이다. 이 시절엔 묵과 채색의 토낼리티가 중요한 요소였다. 두번 째의 것은 장지에 채색으로, 2천년 대 초중반 원경의 숲이나 수목을 배경으로 전경의 꽃을 클로즈업한 사경(寫景) 중심의 그림들이다. 원경은 여린내기의 실루엣으로 하고, 근경은 치밀성⋅생략⋅단순화를 빌려 양식화한 백난과 백합, 야생소국(구절초)을 주모팁으로 다루었다.
근작 <生 ― 낮은 곳>은 2007년 이후 현재에 이르는 생애의 세번 째의 스텝을 보여준다. 여기서는 확실히 사경을 넘어선다. 근작들은 앞 절에서 언급한 자연과 의상의 접점을 시도함으로써 사경을 극복한다. 처음에는 그래픽한 획으로 풀의 율동을 강조하다가, 점차 화면을 하늘과 대지의 2분화를 시도하거나, 그리드에 의해 오간색조의 ‘색면 섹션’으로 처리하거나, 우유빛 홍조의 발염을 도입하는 변조를 시도한다.
초기 기층민의 애환을 다루었을 때는 수묵의 연계선에서 채색을 다루다가, 점차 순수한 채색으로 발전해서, 지금은 최소한의 수묵과 최대한의 채색을 구사한다. 역시 화면 처리의 한 특징이 아닐 수 없다.
그녀의 주제들은 일관되게 ‘낮은 곳의 삶’을 다루는 걸로 일관해왔다. ‘낮은 곳’은 대체로 고단한 삶이 이루어지는 기층민들의 터전으로부터 우거진 자연의 숲을 거쳐, 근작의 풀밭으로 이어졌다.
그녀의 ‘낮은 곳’은 생명의 서식처와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다. 생명체는 땅에서 시작된다는 전제에서 ‘굴지성’(掘地性, geotropism)을 강조한다. 굴지성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낮은 곳으로 임하소서’ 같은 크리스천의 기원을 기의의 상층부로 하는 카운터 파트로서 하단부를 이룬다. 낮은 것들, 비천한 것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표현이다. 기의의 하단부인 굴지성은 중력에 의해 식물의 뿌리가 땅을 지향하는, 이른 바 향지성(向地性)을 빌려 넓게는 생명체들의 순환을 대지와 연관시킨다. 이에 반해, 기의의 상층부는 모든 생명체들의 순환을 생명의 향천성(向天性, astropism)으로 규정하고, 이를 크리스천의 마음으로 감싸안으려는 데 뜻이 있다.
권희연의 근작들은 특히 겸재(謙齋)의 진경(眞景)에서 청전(靑田)의 내경(內景)에 이르는 우리의 전통 화맥에서 보아 그 나름의 차별성을 갖는다. 그 동안 대부분의 작가들이 전자와 후자 사이에서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있는 데다 송(宋)대의 남북종화의 이분법에서 마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겸재의 진경을 숭앙한 나머지 그 진의를 오늘의 시점에서 재검토하지 않은 채, 양식적으로만 부단히 연장시키려는 작위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한국화 하면 으레히 진경, 실경, 사경의 어느 경우여야 한다든지, 그렇잖으면 의상 중심의 관념 산수거나, 형사 중심의 실경산수여야 한다는 양자택일의 관습이 만연해 있다.
권희연의 근작들은 차제에 이러한 이분법들을 넘어 제 3의 길을 모색하고 있어 그 의의가 여간 크지 않다. 앞으로의 행보가 그래서 주목된다.
 
09,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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